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Prologue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 By 양희은,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첫번째 이야기
손이 떨려왔다.
조금 소심하기도 한 그였지만 이렇게 떨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인장을 찍듯이, 그는 조심스럽게 공중전화의 번호판를 눌렀다.
" 따르르릉~ 따르르릉~ "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그냥 수화기를 내려 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이 번호를 알기위해 그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 딸깍. "
수화기 드는 소리가 들렸고,
" 여보세요? "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로 그녀가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잠시 전화기에 머리를 기대고 있더니,
결심한 듯 이를 꽉 물고 전화박스를 나서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타고 싶지 않은 듯 그는 계단을 밟아 8층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몇호인지 확인하는 듯 복도를 따라 죽 걷더니, 807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 앞에서 10분 가량을 서 있었다.
갑자기 대문 열리는 소리가 원래 그 자리에 박혀있던 것 처럼 서 있던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6살 정도 되어보이는 꼬마 아이가 장난감 포크레인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놀이터로 가는 듯 했다.
그는 지레 겁을 먹은 자신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는, 드디어 손을 들어 벨을 눌렀다.
" 찌르르르릉~ "
그에겐 몇 분처럼 느껴졌을 몇 초간의 침묵이 지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세요? "
그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누구세요? "
하지만 대답을 해야만 했다.
" 나야.. "
도대체 나가 누구냐고 되묻는 듯 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그리고 그녀는 어색한 얼굴의 그를 보았다.
사람은 너무 놀라면 할 말을 잊어버린다고 했다.
바로 그녀가 그랬다.
" 너... 너... "
그렇게 힘들었는데, 막상 그녀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열고 3년전 헤어질 때 들었던 말을 만남의 인사로 사용했다.
" 안녕. "
" 세상에.. 너 여기 어떻게 왔어? "
" 잠깐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 "
" 얘~ 누구니? "
" 아니에요, 엄마. 저 잠깐만 나갔다 올께요. "
덜컹~
그리고 아파트 앞 벤치에서 아까 질문들의 대답이 진행되었다.
" 너 여기 어떻게 알았어? 누구한테 물어본거야? "
" 그냥 어떻게 알게 됐어. 근데 너.. 나 의무경찰 지원한 건 알았었니? "
" 아니. 너 의경 갔어? 군대 안간다면서? "
" 그렇게 됐어. "
의경을 지원한 단 한가지 이유는,
경찰이 되면 그녀가 이사한 주소를 컴퓨터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 그래.. 아무튼 반갑다. 얼마만이지? "
" 3년만이야. "
"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
그가 기억하기로는 1098일 3시간째였다.
" 그런데.. 왜 여기까지? "
" 아, 저기.. 이거 돌려줄려구. "
" 어! 이거 내 가방이잖아! "
" 응. 순찰 돌다가 우연히 쓰레기통 옆에 버려져 있어서.... "
" 누가 가져갔다가 돈 될게 없으니까 그냥 버렸나 보구나.
실은 얼마 전에 지하철 타다가 그냥 놓고 내렸거든.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
" 한번 열어봐. 속에 책 몇 권 있는 것 같던데. "
" 응.. 다이어리까지 다 있네. 고마워.. 근데 이게 내 가방인 어떻게 알았어? "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신고 있던 신발 색까지 아직 기억하고 있는
그가 그녀의 가방에 달린 그가 사준 열쇠고리를 잊을리 없었다.
" 그냥 네 가방 같아서.. 너 가방 뒤에 실로 이름 새겨놨잖아. 보니까 네꺼 맞더라구. "
" 그랬구나.. 고마워 정말. "
그리고 몇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그녀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할 말은 너무도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 그럼 이제 가 볼께. "
" 벌써 가? 아직 말도 별로 못했는데. "
그녀의 말이 인사치레가 아니길 바랬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인사치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 이제 가 봐야돼. 너무 오랫동안 나와 있었거든. "
" 그래.. 이거 돌려줘서 정말 고마워. 잘 가. 몸 건강하구. "
그녀는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 그래. 잘 있어. "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그녀가 깜빡 잊었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 아 참, 그런데 조금 전에 전화했다 그냥 끊은 거 너니? "
" 아니. "
" 어.. 그럼 누구지.. "
" 다른 사람일꺼야. 난 아니야. "
" 그래... 그럼 잘 가. 나도 들어갈께. 안녕~"
" 안녕. "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찾아오지 않는 편이 나을 뻔 했다.
하지만 후회라는 것은 이미 저지르고 난 후에 할 수 있는 일.
그녀의 다이어리에서 다른 남자의 사진이 떨어졌을 때 그는 이미 찾아오면 후회할 것을 알고 있었다.
노을 너머로 길어진 그림자가 그를 따라 걸어갔다.
두번째 이야기
" 오빠,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 "
" 이번 주말에는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
" 그럼 다음주에는요? "
" 다음 주에는 시험이 2개 있어서 좀 힘들 것 같다. "
" 그래요.. 알았어요. "
" 미안하다. 나 이제 졸리거든? 끊을께. "
" 네, 오빠. 안녕히 주무세요. "
뚝.
그는 잘 자라는 조그마한 말도 남기기 아까운 듯 바로 전화기를 끊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 책상위에 놓여진 색종이 더미에서 한장을 꺼내들었다.
반을 접고, 모서리를 접고, 다시 반을 접고 편 다음 보이는 선을 따라 다시 접고....
그녀의 손놀림에 따라 네모난 색종이는 점차 학의 모양이 되어갔다.
그리고 빨간색 학이 완성되자, 그녀는 책상에 놓여진 유리상자에 학을 넣었다.
꽤 커보이는 유리상자는 벌써 2/3정도 종이학으로 차 있었다.
한참을 그 상자만 바라보다가,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서랍을 열고
뒤적 뒤적 거려 서랍 깊숙한 곳에 있던 테잎 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카세트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요새 한참 인기가 있는
Morton Harket의 Can't Take My Eyes Off You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이 노래가 들어있는 테잎을 그에게 받은 건 1년도 훨씬 전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노래를 듣다가, 그에게도 노래를 들려 주고 싶은 생각에
수화기를 들고 그의 삐삐 번호를 눌렀다.
" 삐 소리가 나면 녹음하시고, 끝나면 별표를 누르세요. 삐~ "
찰칵.
그녀는 급히 카세트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제 때 별표를 누르지 못해서 녹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테잎을 뒤로 돌리고, 다시 녹음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녹음은 제대로 되었지만 녹음된 부분이 좋아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다시 테잎을 돌리고, I need you baby가 녹음된 부분부터 새로 녹음을 했다.
하지만 가사가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아 다시 녹음을 했고,
혹시라도 자기가 아닌 남이 녹음한 걸로 착각할까봐 앞에 조금이나마 멘트를 넣기로 했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멘트를 넣지 않은 것이 생각나 새로 녹음을 했다.
그렇게 30여분 동안을 테잎이 닳도록 돌려가며 녹음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들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가 이 노래를 듣고 자신의 20살 생일에
선물한 노래라는 걸 알아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녹음이 끝나자마자 반갑게도 삐삐가 울렸다.
혹시라도 그의 삐삐가 아니면 실망할까봐 그녀는 번호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어 사서함을 확인했다.
음성이 하나 와 있었다.
그녀는 긴장이 되는 듯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1번을 눌렀다.
" 첫 번째 메세지입니다. 삐~ "
" 여보세요? 나 오빤데, "
삐삐에 대고 여보세요 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는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오자 그녀는 실망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결코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 야. 지금 삐삐 들어보니까 무슨 노래 녹음하다 계속 실패하는 것 같은데,
너 녹음하다 그냥 끊어도 삐삐 오는 거 모르니?
지금 삐삐가 몇 번째 왔는 줄 알아? 노래 녹음해 주는 건 고마운데,
좀 그만해. 혹시라도 계속 녹음할까봐 삐삐치는 거니까.
그렇게 알구, 그럼 끊는다. "
아직도 노래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카세트를 끄고, 수화기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서 색종이 한장을 꺼냈다.
색종이 위로 눈물이 떨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아까와 같은 동작으로 학을 접어서 유리상자에 넣었다.
이 유리상자가 가득 차는 날
그녀는 그와 헤어지게 될 것이다.
세번째 이야기
낯설었다.
대학은 그에게 있어 낯선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낯선 공간에 포함되기 위하여 1년을 더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회색 건물 사이를 걸어서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음악회에는 빈 손으로 오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방금 왔던 길을 다시 걸어 학교 앞의 꽃집에 도착했다.
" 저, 꽃 좀 주세요. "
" 무슨 꽃을 드릴까요? "
" 음... 저... 지금 음악회 가려고 하는데요, 어떤 꽃을 사가는게 좋을까요? "
" 글쎄요.. 요새 프리지아가 참 이쁘긴 한데. 백합도 괜찮구. 그냥 학생 마음대로 해요. "
학생이라는 단어가 목에 가시처럼 걸려왔다.
재수생은 학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인도 아니었다.
" 정 못 고르겠으면, 그냥 백합으로 해요. 안개꽃이랑 서너송이 싸면 이쁘니까. "
" 아... 아뇨, 백합 말구요, 안개꽃만 주세요. "
" 안개꽃? 저건 다른 꽃이랑 같이 하는 거에요. "
" 그래도 그냥 안개꽃만 주세요. "
" 그럼 안이쁠텐데.. "
" 괜찮아요. 그냥 주세요. "
" 그렇게 해요, 그럼. "
그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꽃집 아줌마의 시선을 피해 시계를 보았다.
8시 20분.. 음악회가 시작한지 20분이나 지나있었다.
그가 안개꽃 꽃다발을 들고 다시 음악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40분이 지난 후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가로등을 등지고 음악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무대 오른쪽 끝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 가려 잘 안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녀를 한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연주하는 악기가 바이올린인지, 비올라인지, 첼로인지, 그런건 상관 없었다.
그녀가 그녀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연주하는 소리가 다른 사람과 어울려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그들 안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앞으로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그는 그들의 밖이었다.
그는 그녀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난 안개꽃이 제일 좋아. 안개꽃은 다른 꽃들을 돋보이게 하잖아.
자기도 자기 나름대로 이쁘지만, 자기만 잘난 꽃이 아니라
다른 꽃들도 돋보이게 하는 꽃은 안개꽃밖에 없으니까. "
하얀 옷을 입은 그녀는... 안개꽃 같았다.
안개꽃처럼 다른 사람들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회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나가려는 그에게 음악회장 입구에 앉아있던 학생이 소리쳤다.
" 저, 방명록 안쓰고 가세요? "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명록 쓰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학생이 건네는 펜을 들고 방명록에 방금 자신이 느낀 감정을 썼다.
" 사랑해. "
그리고 펜을 놓고 돌아서 가려다, 다시 돌아와 아까 쓴 글에 덧붙여 썼다.
" 사랑해. 너의 친구로부터. "
그는 음악회장을 빠져나왔다.
아까의 가로등이 변함없이 푸르스름한 빛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길을 따라 걸으며, 그는 손에 든 안개꽃 꽃다발에서 안개꽃을
한 송이씩 꺾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렇게 그는
그녀 곁에 더 오래 남아있기 위해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Epilogue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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