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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시어 풀이>
늬 : ‘너’의 예스러운 표현.
칡범 : 몸에 칡덩굴 같은 어름어름한 줄무늬가 있는 범.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밝음과 어둠의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어둠의 세계가 가고 밝고 평화로운 세계가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어둠은 절망적인 현실을 나타내며, 밝음은 절망을 극복한 새로운 삶의 세계를 나타낸다. 산문시 형식으로 쓴 시는 내용으로 볼 때, 열정적·진취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이 시는 상징적이며 대립적 의미의 시어로 주제를 강조하는 한편, 시구의 반복과 변주(變奏)로 리듬감을 형성하고 있으며, 명령형 어미와 호격 조사를 사용하여 화자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화자가 간절히 바라는 대상은 ‘해’이다. 이는 세상을 환하게 비춰주는 광명을 상징한다. 화자는 ‘해’가 떠올라 ‘어둠’을 물리쳐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1연부터 ‘해야 솟아라’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화자가 살아가는 당시의 현실이 밝은 해가 비치지 않는, 어둠과 같은 절망적인 세계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새로운 밝은 세상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2연에서 화자는 ‘달밤’으로 상징되는 절망과 고통, 슬픔으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싫여’라는 말로 세 번 강조한다. ‘눈물 같은 골짜기’는 슬픔으로 가득찬 현실을 가리키며, ‘아무도 없는 뜰’은 외로운 공간을 의미한다.
3연에서 화자는 ‘청산이 좋아라’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기를 바라고 있다. 여기서 ‘청산’은 ‘어둠, 달밤, 눈물 같은 골짜기, 아무도 없는 뜰’과 대비되는 긍정적 매개물로 ‘해’와 함께 밝음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청산'은 마지막 연에서 보듯이, 사슴과 칡범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온갖 꽃들과 새들, 그리고 짐승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서 살아가는 세상이다. ‘훨훨훨 깃을 치는’은 햇빛을 받은 청산의 약동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홀로래도 좋아라’는 이상세계가 오기만 하면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다는 절실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4과 5연은 화자가 지향하는 이상향인 화합하고 공존하는 평화의 세상을 표현한 것이다. 사슴, 칡범과 함께하는 세상, 즉 약자와 강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서로 화합하며 공존할 그날을 꿈꾼다. 이 대목은 구약성서 이사야 11장 6절~8절에 나오는 평화의 나라와 흡사한 평화의 나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6연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다. 시의 화자가 바라는 ‘앳되고 고운 날’은 ‘꽃, 새, 짐승’이 모두 한자리에 앉아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계이다. 강자와 약자가 함께 하는 화합의 세계이며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아가 민족의 영화로운 역사가 펼쳐질 새로운 조국의 모습이기도 하다.
또,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은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사랑과 평화의 세계에 가깝다. 박두진이 추구하는 기독교적 세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청산' 속에서의 삶이다.
▲작자 박두진(朴斗鎭, 1916~1998)
시인. 호는 혜산(兮山). 경기 안성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향현>, <묘지송>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조지훈, 박목월과 더불어 해방의 감격 속에서 초기의 시들을 모아 1946년에 《청록집》이라는 공동 시집을 발간하면서부터 ‘청록파(靑鹿波)’로 불린다. 이들의 시는 우리말의 특징을 잘 살려 자연에 인간의 심성을 담은 시를 썼으며, 광복 후에도 시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초기에는 그리스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자연을 읊다가 차츰 사회현실에 대한 의지를 노래했다. 그리고 후기에는 기독교적 신앙 체험을 고백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시집으로 《청록집》(1946), 《오도(午禱)》(1953),《거미와 성좌》(1962), 《인간밀림》(1963)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시집으로 《박두진시선》(1956), 《사도행전》(1973), 《하늘까지 닿는소리》(1973), 《수석열전(水石列傳)》(1973), 《야생대》(1981), 《포옹무한》(1981), 《불사조의 노래》(1987), 《폭양에 무릎을 꿇고》(1995) 등과 시선집으로 《청록집 기타》(1968), 《청록집 이후》(1968), 《에레미야의 노래》(1981) 등이 있다. 그밖에 수필집으로 《시인의 고향》(1968), 《언덕에 이는 바람》(1973) 등과 시론집으로 《한국현대시론》(197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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