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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해설> -정끝별·시인
그늘! 나비 그늘, 꽃 그늘, 나무 그늘, 처마 그늘, 담 그늘, 당신 그늘, 심지어 위태롭게 서 있는 전봇대나 바지랑대에도 그늘은 있다. 그늘은 눈부시지 않고 어둡지 않다. 뜨거운 햇살은 가려주고 비바람은 대신 먼저 맞아준다. 여운, 깊이, 여유, 멋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림자와 다르다. 그래서일까. 그늘 아래 서면, 잠시, 시간도 잊고 이름도 잊고 일도 잊고 갈 곳도 잊는다. 그늘 아래 스스로를 부리듯 노동과 불안과 걱정을 부려두고, 잊거나 잃은 것을 떠올리며 눈물짓기도 한다.
시간과 계절은 너무 빨리 달아나고, 우리는 너무 빨리 늙고, 늘 배고픔과 실직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출근과 스트레스와 피로와 시름과 술과 담배에 지쳐 있는데… 맨땅에 뿌리를 내린 채 사시사철 변함 없는 사철나무의 그늘이니 참 깊고 넓겠다. 시인 장정일(46)이 꿈꾸던 '사철나무 그늘', 누구나 그런 그늘 하나쯤은 꿈꾸기 마련이다. '가장 장정일답지 않는 시'임에도 가장 많이 애송되고, 시인 스스로도 첫 시집을 여는 시로 삼았던 까닭일 것이다.
이 시는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이 반복되는 보니엠(Boney M)의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를 들으며 읽어야 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편, 137편)라는 성경 구절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탑과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번영의 땅 바빌론은, '시온(Zion·예수살렘의 도시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을 생각하며 견뎌야 했던 이방의 땅, 고난의 땅, 타락의 땅이다. 원조 '디아스포라'의 고난과 희망이 담긴 디스코 풍의 이 노래는, 80년대 내내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쉬'던 공장노동자들의 휴식시간을 장악하기도 했던가.
불온하다는 말, 문제적이라는 말이 장정일처럼 잘 어울리는 시인이 또 있을까. 중졸의 학력과 방황의 청소년기,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했다는 독학, 최연소 '김수영 문학상' 수상, 극작가, 소설가, 외설 시비, 무시무시한 독서량, TV 교양프로 진행, 교수…. 그는 정복자처럼 자신의 삶을 찬탈했으며 게릴라처럼 80년대 시단을 점령했다. 그리고 어느날 '시 쓰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그가 이른바 '쉬인' 장정일이다. '동사무소 하급 공무원'을 꿈꾸며 들었을 '바빌론의 강가'를 다시 들으며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쉬는 마음'을 헤아려보는 아침이다.
<출처> 2008.03.18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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