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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시/애송시100

님의 침묵 / 한용운

by 존글지기 2021.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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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일러스트 = 잠산

 

<해설> - 문태준·시인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은 식민지 시대를 살다 간 혁명가요, 시인이요, 수행자였다. '님의 침묵'은 1926년에 펴낸 그의 유일한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이자 서시이다. 이 시는 님과의 이별과 이별의 슬픔을 재회(再會)로 역동적으로 바꿔놓는다. 이런 극적 구성은 불교 특유의 유심적 상상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돌이키는 것으로써 만해는 있음과 없음, 좋음과 그렇지 못한 것,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만남과 이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아마도 만해의 시를 올연히 뛰어나게 하는 힘은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려는 마음의 편당(偏黨)과 굴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그의 수행자적 기풍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역설의 화법이 생겨났을 것이다.

  만해는 시집의 맨 앞에 놓인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라고 썼다. 만해는 님을 절대적인 추앙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고, 님과 나의 관계를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해석했다. 만해는 내 안에서 님을 발견하고 완성하고자 한 실천가였다.

  조선의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떻게 불 땐 방에서 편히 살겠느냐며 만해는 냉골의 거처에서 꼿꼿하게 앉아 지냈다. 해서 '저울추'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돌집(조선총독부)이 마주 보이는 쪽으로 당신의 집을 지을 수 없다며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만해는 깨달음을 얻은 후 오도송에서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그네의 수심에 잠겼던가. 한마디 소리쳐 우주를 설파하니 눈 속의 복숭아꽃 붉게 붉게 나부낀다"라고 읊었다. '눈 속에 핀 복숭아 꽃송이'가 바로 만해의 시요, 만해의 정신이었다 할 것이다.

<출처> 2008. 1. 24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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