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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87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문태준·시인 김영랑의 본명은 윤식(允植). 1915년 결혼했으나 일찍 상처(喪妻)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 2021. 10. 26.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일이 끝나 저물어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정끝별·시인 정희성(63) 시인은 해방둥이다. 올해로 38년의 시력에 4권의 시집이 전부인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시(詩)를 찾아서〉), 그의 시를 읽노라면 언(言)과 사(寺)가 서로를 세우고 있는 시(詩)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시는 나직.. 2021. 10. 25.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문태준·시인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건/ 사람뿐이다.// 시간에 집을 지으라/ 생각에 집을 지으라//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것은/ '오고 가는 것'들이다."(〈의자 6〉) 조병화(1921~2003) 시인의 시 〈의자 6〉을 읽고서 나는 망연히 물처럼 앉아 있다. 나의 바깥은 바람 가듯 물결 지듯 지나가는 것이 있다. 순간순.. 2021. 10. 22.
맨발 / 문태준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2021. 10. 21.
비망록 / 김경미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 2021. 10. 20.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2021. 10. 19.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 2021. 10. 15.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문태준·시인 ----------.. 2021. 10. 14.
철길 / 김정환 철길 /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2021. 10. 11.
낙화 / 이형기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문태준·시인 꽃이 지고 있다. 손에 꼭 쥐었던 것을 놓아버리고 있다. 어떤 꽃의 낙화에는 만행을 떠나는 수행자의 뒷모습이 있다. 미련 없이 돌아서기 때문에 낙화에는 구차함도 요사스러움도 없다.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이별은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 며칠 눈물을 돌게 할 것이다. 그.. 2021. 10. 8.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정끝별·시인 기운생동, 만화방창의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이는 엘리어트였다. 우리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부여의 시인, 금강의 시인, 신동엽(1930~1969)은 이렇게 노래했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2021. 10. 7.
서시 / 이시영 서시 / 이시영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문태준·시인 이시영(59) 시인을 떠올리면 그가 늘 쓰고 다녔던 검고 둥글고 큰 뿔테 안경과 그 너머의 빛나는 안광(眼光)이 생각난다. 깡마른 체구와 또각또각 한마디씩 끊어가며 내놓는 정직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1974년 문인들의 민주화운동 조직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 참여한 이후 엄혹의 시대와 맞서는 문인의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해 연행되고 구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9년 《창작과비평》 주간으로 있을 때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잡지에 게재했다는 .. 2021. 10. 6.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2021. 10. 4.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 청년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1936년) -문태준·시인 함형수(1914~1946) 시인은 생전에 불과 17편의 시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해서 노동자 숙박소 등을 전전했지만 하모니카와 시 노트만은 꼭 갖고 다녔다. 한 여배우와 동거했지만 사랑에 실패하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다 북에서 숨졌다. 그는 .. 2021. 9. 30.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 정끝별·시인 사월이면 보리가 패기 시작한다. 초록이 지천으로 팬 보리밭을 지날 적이면 보리피리가 불고 싶어진다. 보리의 싹이 나오기 전의 보릿대를 꺾어 불면 피-ㄹ- 소리가 났다. 보릿대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손톱으로 작은 구멍을 내 요령껏 불면 피-ㄹ 닐니리 소리가 나기도 했다. 청보리밭의 소리이자 고향의 소리 피-ㄹ 닐니리. 피-ㄹ 닐니리는 향수의 소리다.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1920~1975).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문둥이'였.. 2021.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