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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시/애송시100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by 존글지기 2021.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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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1975년>

 

 

▲일러스트 잠산

 

 

<해설> 문태준·시인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질 뻔했다. 송수권(68) 시인이 서대문 화성여관 숙소에서 이 작품을 백지에 써서 응모를 했는데, 잡지사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의 원고"라며 휴지통에 버렸다. 당시 편집 주간이었던 이어령씨가 휴지통에 있던 것을 발견해 1975년 '문학사상' 지면에 시인의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일화로 '휴지통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고, 발표 이후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를 애타게 호명하고 있지만, 이 시는 남동생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悲歌)였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비어 있는 맞은편을 망연히 바라보았을 그 시방(十方)의 비통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 죽은 동생의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을 드러낸다.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등의 역동적인 문장은 적극적인 환생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산문(山門)은 속계(俗界)와 승계(僧界)의 경계이고, 이승과 명부(冥府)가 갈라지는 경계인 바, 산문에 기대어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송수권 시인은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어오면서 황토와 대(竹)와 뻘의 정신에 천착해 왔다. 그는 '곡즉전(曲卽全·구부러짐으로써 온전할 수 있다)'을 으뜸으로 받든다.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추억이 있고, 들숨이 있지요.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공간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애지고 막막'하게 하지만 남도 특유의 가락과 토속어의 사용으로 슬픔과 한을 훌쩍 넘어서는 진경을 보여준다.

<출처> 2008.01.31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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