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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시/애송시100

바다와 나비 / 김기림

by 존글지기 2021.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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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일러스트 권신아

 

<해설> -정끝별·시인  

  청산(靑山)이라면 몰라도 바다는 나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에 비해 흰나비는 얼마나 작고 어리고 가냘픈가. 이 무구한 흰나비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알 수 없는 수심과 거센 물결에 대해 들은 적도 없다. 흰나비에게 푸르게 펼쳐진 것은 청(靑)무우밭이고 그렇게 푸른 것은 꽃을 피워야 마땅하다. 흰나비가 삼월의 바다에서 청무우꽃을 꿈꾸는 까닭이다. 그러나 짜디짠 바다에 흰나비의 날개만 절 뿐, 삼월이어도, 바다가 푸르긴 해도, 바다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나비의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만 비친다. 삼월의 바다, 어린 나비, 초생달은 모두 이른 것들이다. 시작인 것들이다.
 
   허공을 나는 것들은 날개가 중요하고 땅을 걷는 것들은 허리가 중요하다. 헌데 '나비의 허리'라니! 공주의 아름다움은 춤에 있고 나비의 아름다움은 비상(飛翔)에 있다. '공주처럼 지쳐서' 바다에서 돌아온 나비. 바다로의 비상에 실패하고 뭍으로 귀환한 '나비의 허리'는 상징적 의미가 깊다. 이제 흰나비는 청무우 꽃그늘을 노니는 그런 나비가 아니다. 짜디짠, 바다의 깊이와 파도의 흔들림을 맛본, 허리가 실한 나비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고 흙이 묻"('주피터 추방')기 마련이다. 새롭고 먼 곳을 향해 비상하다 날개가 절어본 적이 있기에, 흰나비는 이제 흙이 묻더라도 땅을 밟는 사랑을 알았으리라.
 
   이 시의 꽃은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이다. 하얗고 가늘고 기다란 나비의 몸과 초생달이 그려지고, 새파란 바닷물에 새파랗게 전 흰나비의 허리가 그려지고, 지쳐 돌아오는 흰나비 허리를 비추는 저물녘 초생달이 그려지기도 한다. '시린' 풍경들이다. 어쨌든 '바다'가 냉혹한 현실이라면 '나비'는 순진한 꿈의 표상이다. 꿈은 언제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른 채 도전한다. 근대 혹은 서구문명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역사 혹은 시대의 흐름 앞에 무력했던 시인의 모습도.
 
   김기림(1908~?) 시인의 탄생은 현대시 탄생과 그 햇수를 같이 한다(얼마 전 출생연도가 1907년으로 기록된 학적부가 발굴되어 탄생 101주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30년대 이상(李箱)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모더니즘을 주도하면서 서구문명 지향하는 '새로운 생활'을 동경했다. 그는 기자, 문학비평가(이론가), 번역가, 대학 교수를 겸한 모더니즘 선봉에 선 시인이었으나 분단과 전쟁은 그를 납북 이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비운의 모더니스트'로 만들어버렸다.

<출처>  2008.03.11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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