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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시/애송시100

투명한 속 / 이하석

by 존글지기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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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속 / 이하석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1980년>

 

▲ 일러스트 권신아

 

<해설> - 정끝별 시인
            
  투명한 것은 비친다. 통과하며 통과시킨다. 더 많은 것들을 제 속에 '품어 비춘다'. 투명한 속은 제 속을 훤히 드러내며 더 많은 것들을 제 몸에 비추어낸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은 투명한 속을 깊숙이 열며 '비쳐 들어간다'. 시간의 흔적과 문명의 찌꺼기를 받아들이고 뱉어내는 유리 부스러기의 투명한 속은 보호구역이다. 그 투명한 속은 끝이 없다. 투명한 유리 속 제비꽃처럼, 그 찬란하고 선명하고 쓸쓸하고 고요한 남빛 그림자처럼.

  이하석(60) 시인의 〈투명한 속〉을 읽다보면 영화 《밀양(密陽)》의 '햇살이 시궁창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마당 한구석의 흙탕물을 비추는 그 비밀스런 햇볕 혹은 숨어있는 햇살에 카메라 시선은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하석 시인의 시선이 그렇다. 그는 도시문명 속에서 구석지고 버려지고 망가지고 폐허화된 '것들'의 뒷풍경을, 클로즈업된 카메라 시선으로 보여준다. 인간을 편리하고 안락하게 해주는 현대문명의 뒷면에는 산업쓰레기와 비인간적 삶이 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그가 살고 있던 대구 주변에 널린 산업쓰레기 현장을 흑백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바탕으로 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사진처럼 감정 개입은 배제한 채. 쓰레기 가득한 이러한 낯선 시선은 '냉혹한 사실주의' '극사실주의'로 평가되었으며 1980년대 우리 시단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쇳조각, 폐타이어, 유리병, 깡통, 껌종이, 신문지, 비닐 등 산업화의 노폐물들은 흙과 풀뿌리에 뒤엉켜 덮여 있다.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 놓으며"(〈뒷쪽 풍경 1〉)에서처럼, 그것들은 쉽사리 흙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풀과 더불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들, 오랜 시간 후 흙과 풀뿌리에 깃들어 투명해지고 흙과 풀을 제 속에 품어 비칠 때, 그것들의 투명한 속은 흙과 풀을 통과하며 통과시킨다. 먼지와 녹물과 날카로움과 독성을 잠재우며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이 시도 버려진 유리병(조각)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있다. 유리의 반짝임과 투명함 쪽으로 흙과 풀들은 뻗어나간다.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로 상징되는 '제비꽃'은 버려진 유리 부스러기의 '투명한 속'을 비쳐 오고 비쳐 들어간다. 봄의 기운 혹은 생명의 싹 혹은 자연의 힘이다. 우리는 날마다 보고 있지 않은가. 유리 부스러기 속, 제비꽃 같은 남빛 그림자를! 시멘트 콘크리트 틈으로 돋아나는 노란 민들레꽃이나, 타일 콜타르 틈으로 삐쳐 나온 연한 세 잎 네 잎 클로버의 경이 그 자체를!

<출처> 2008. 4. 10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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