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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87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 (江)을 처음 보것네. - 문태준·시인 박재삼(1933~1997)은 생전에 '슬픔의 연금술사'로 불린 시인이다. 시 '눈물 속의 눈물'에서 "꽃잎 속에 새 꽃잎/ 겹쳐 피듯이// 눈물 속에 새로 또/ 눈물 나던 것이네"라고 노래했듯이 그의 시들은 눈시울이 촉초근하게 젖어.. 2021. 8. 4.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 2021. 8. 3.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 문태준·시인 번짐이라니. 바뀜이 아니라 번짐이라니. 목련꽃이 피는 일을,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절의 순환을, 너와 나 사이 사랑과 이별의 사건을,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그 둥?을, 시간과 공간의 옮김을 번짐이라고 부르다니. 먹물이 화선지에서 고요하게 번지듯이. 그리하여.. 2021. 8. 2.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정끝별·시인 동치미 무를 먹으며 아삭아삭 달을 베어먹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팥죽에 뜬 새알을 떠먹으며 어두운 밤하늘을 들락날락하는 달을 떠먹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달걀과 밀가루가 들어간 둥근 지짐.. 2021. 7. 30.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문태준·시인 시름 많은 사람들과 "어두운 땅 한 평 가꾸다 갈래요/ 우리나라 하늘 한 평 비추다 갈래요.. 2021. 7. 29.
봄 바다 / 김사인 봄 바다 / 김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 정끝별·시인 구장집 마누라는 방뎅이도 크고 젖통도 크고 잠도 푸지게 잘 자니 미끈덩 아들 쑥쑥 낳겠다. 역시나 셋째가 제일 미끈덩하겠다. 미끈덩 인물 재산이겠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라도 되는 양 바람깨나 피우겠다. 도망치듯 상경해 이양저양 살피다 부잣집 과부 만나 한몫 챙기기도 하겠다. 살집 좋은 과부 곁에서 시름시름 늙어가며 이모저모 기웃대다.. 2021. 7. 28.
나그네 / 박목월 나그네 / 박목월 강(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문태준·시인 이 시는 박목월(1916~1978)이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펴낸 3인 시집 '청록집'(1946)에 실려 있다. 임시 정가 30원의 '청록집'을 발간한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시인들은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 서정시의 큰 산맥을 이룬 이 3인은 모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경주에 살고 있던 박목월을 조지훈이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이 시는 박목월과 조지훈의 각별한 관계에서 태어났다. '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으로 이 시를 썼기 때문이.. 2021. 7. 27.
바다와 나비 / 김기림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정끝별·시인 청산(靑山)이라면 몰라도 바다는 나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에 비해 흰나비는 얼마나 작고 어리고 가냘픈가. 이 무구한 흰나비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알 수 없는 수심과 거센 물결에 대해 들은 적도 없다. 흰나비에게 푸르게 펼쳐진 것은 청(靑)무우밭이고 그렇게 푸른 것은 꽃을 피워야 마땅하다. 흰나비가 삼월의 바다에서 청무우꽃을 꿈꾸는 까닭이다. 그러나 짜디짠 바다에 흰나비의 날개만 절 뿐, 삼.. 2021. 7. 26.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문태준·시인 '입아아입(入我我入)'이라고 했다.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고 했다. 이 세계는 서로가 연결되어 주고받는 중중무진(重重無盡) 연기의 세계이다. '법화경'을 보면 입아아입을 몸소 실천한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는 이가 있다. 그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공경합니다. 나는 당신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고 말하면서 살았다. 막대기나 돌멩이로 때릴 때도 피해 도망가면서 그는 이.. 2021. 7. 24.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2021. 7. 23.
봄 / 이성부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문태준·시인 봄! 살찐 볼을 만지는 것 같다. 입안에 쑥 냄새가 돈다. 노란 산수유 그늘도 펼쳐진다. 연못가 버들개지도 눈을 뜬다. 볕은 보송보송하다. 옷은 가볍고 걸음은 경쾌하다. 찬 없이 따뜻한 밥과 냉잇국 한 그.. 2021. 7. 22.
바람의 말 / 마종기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정끝별·시인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마음이 울렁거리는 일이다. 바람 불면 그곳이 어디든 따라 나서고 싶고, 바람 들면 온몸이 저절로 살랑살랑 나부끼게 되고, 바람나면 불타는 두 눈에 세상 보이는 .. 2021. 7. 21.
서시(序詩) / 윤동주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문태준·시인 너무나 아름다운 이 시를 통째로 암송할 수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말씨와 어렵지 않은 입말로 쓴 시. 무엇보다 이 시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천상의 별과 지상의 잎새에 걸쳐 있는 넓은 공간의식도 놀랍다. 삶은 잡목림 같은 것. 해서 번뇌와 의혹과 부정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어와 잎새와 같은 우리를 교란시키는 것. 부끄러움은 하루 걸러 오는 것. 그러나 어둠을 배경으로 별은 빛나고, 바람과 같은 시련을 만날 때 큰 .. 2021. 7. 20.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 2021. 7. 16.
어디로? / 최하림 어디로? / 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문태준·시인 최하림(69)은 한글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62년 평론가 김현·김치수, 소설가 김승옥과 한글 세대 최초의 동인지 '산문시대'를 함께 냈다. 최하림 시인의 시는 점점 그윽하다. 그는 내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조금 걸어나가면 강이 바라보이는 양수리 그의 집에 갔을 때에도 그는 어둠이 내리는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의 말은 "참 좋지요"가 전부였다. 그에게는 오연(傲然)함이.. 2021. 7. 15.